마태복음 26장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태복음 26장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by 소북소북 2021. 3. 2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26-28장)

 

26-28장은 복음서의 결론부이자 절정이다. 중심 주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 주제는 이미 예루살렘 여행 떠나시면서 예고했던 주제이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16:21)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17:22-23)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의 자리이자 부활의 자리이다. 그런데 그 결정적 사건들이 예고하신 대로 일어나고 있다. 이 기술 과정에서 마태는 이런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부각한다. 그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어 왔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됨을 명확히 밝히신다. 56절

 

28:6 부활까지도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이루어짐을 마태는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이 이야기 단락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승리임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의 힘이 모자라서 그들에게 희생당한 결과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적대자들의 무력을 제압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모든 과정에서 자신 스스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다. 지금이 자신이 죽어야 할 때임을 분명히 인지하신다. 26:18

 

유월절 식사와 예수님의 죽음의 때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본 단원에서는 세 가지 주제가 두드러진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
2)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적극적인 역할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실패하는 제자들

수난을 위한 준비(26:1-46)

1. 1. 도입(26:1-5)

예수님은 당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견하신다. (2절). 십자가에 못 박힌다. 여기서 20:19 십자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내다보신다. 여기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데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 메시아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잡아 죽일 방도를 꾸미는 것은 충격적이다.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까지 이 사람들이 주도해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도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을 반대했지만 정치적 힘은 없었다. 그 힘은 공회의 회원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있었다. 실질적 예수님의 죽음을 주도했던 자들은 이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예상되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이다. 지도자의 본문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라면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환영하도록 해야만 했을 텐데 현실에 눈이 어두워 환영이 아니라 그분을 죽이려 하는 것이 그들의 현 모습이었다.

 

1.2.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26:6-13)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들이 복음서에는 몇 번 나타나나다. 그 여인들 사건을 비교해보면

눅 7:36-50 갈릴리
요 12:1-8
마 26:6-13
막 14:3-9

 

유사하지만 별도의 사건들이다.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가? 12절. 예수님의 죽음을 내다보는 행동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이 여인은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자들도 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죽음의 준비를 엄청난 비싼 값의 기름으로 (막에 보면 3백 데나리온.)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13절.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이 여자의 행동은 소중한 행동임을 예수님은 극찬하신다.

1.3. 유다의 배반(26:14-16)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열두 제자 중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이고 충격적이다. 그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완전한 전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1. 종교 지도자들(예수님을 대적하여)
           2. 한 여인(예수님을 위하여)
 1' 제자들 중 하나 (예수님을 대적하여)

마땅히 예수님을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그를 대적하고, 한 여인은 가장 귀한 것을 바친다.

1.4. 주님의 만찬(26:17-30)

마태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한 것이 무교절 첫날이라고 한다.


(1) 유월절 만찬(26:17-20)

 

<17절>

‘무교절 첫날’
유월절과 무교절을 연결시킨 복음서 저자들의 다양한 표현들

무교절 첫날에 마 26:17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막 14:12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눅22:1

 

26-28장 시간 이해 

유대인들은 무교절 첫날 하면 유월절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니산월 15일이 무교절 첫날이지만 통 산적으로는 니산월 14일 유월절이 무교절 첫날이다. 본문에서는 니산월 14일인 것이다. 유월절이 다가오니까 첫째 날에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양 고기가 중요하다.

그러면 이때 제자들이 생각할 때는 유월절 공식 식사인 무교절 첫날 저녁에 하게 되어 있었다.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이 오후이기 때문에 유월절 끝나 갈 때쯤 양을 잡아 해가 넘어가면 그 양으로 식사를 한다.

예수님은 이때 죽으실 것인가? 죽은 상태에서 식사를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고 싶은데, 양고기는 아직 잡지 않았기 때문에, 양 없이 빵으로 대체해서 유월절 식사를 하신다. (하루 전에) 그리고 겟세마네에 가서 심야기도를 하시고 새벽에 체포되시고 아침 6시 되기 전까지 비공식 심문을 당하고, 해가 뜨자마자 공식적 심문을 당하고 빌라도의 심문 후 아침 9시에 못 박히시고, 3시간 동안 수모와 욕, 조롱을 당하시고 12시에 어두워지고 3시에 숨을 거두심(유월절 양 잡을 시간에 유월절 양으로 숨 거두심). 오후 6시에 장사되고, 그 담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하루 지나서, 여인들이 향품을 넣기 위해 무덤에 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유월절 양의 죽음에서 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2) 배반을 예고하심(26:21-25)

(3) 주님의 만찬 제정(26:26-30)


최후의 만찬이 주님의 만찬으로 제정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신다. 꼭 필요한 양고기가 없기 때문에 대신 빵을 드신다. 빵이 고기를 상징한다. 양고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26절>

labw.n o` VIhsou/j a;rton kai. euvlogh, saj e;klasen kai. dou.j toi/j maqhtai/j,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축복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오천명, 사천 명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바로 오천 명, 사천 명 먹이신 기적에서 각각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습이다. 빵을 들고 오천 명 먹이실 때 축복, 사천 명 먹이실 때 감사기도. 여기서는 두 개 다. 성만찬 제정과 상당히 상징적으로 연관된다. 메시아 잔치의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 빵을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일치시키신다. 이 빵이 내 살이다... 먹어라. 이것 때문에 초대 교회 당시에 오해 많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육 먹는 사람들이다..라는 오해. 그런데 빵을 쪼갠다고 한다. 쪼갠다는 것은 찢는 것을 의미한다. 곧 예수님의 살이 찢기심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고기를 먹음으로써 이집트로부터 탈출의 의미를 되살리고 구출의 결과를 누리듯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구속적 의미를 되살리고 죽음의 효력을 누려야 함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과 구출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28절>

to. ai-ma, mou th/j diaqh, khj to. peri. pollw/n evkcunno, menon eivj a;fesin a`martiw/n, ‘죄 사함을 얻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잔의 신학적 의미 드러내 보이신다.
피를 마시는 개념이 새롭게 도입된다. 유월절 식사와는 구별되는 의식이다. 사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유월절 식사보다는 출 24:28의 시내산 언약 체결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증하는 언약 사건을 연상케 한다. <언약의 피> 표현. 구약의 언약, 희생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이 점들에 있어 새 언약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구약의 언약은 소, 염소, 양이 희생 제물로 드려짐으로 해서 그 피가 언약을 성립시켰는데, 이제 새 언약은 많은 사람이 죄 사함을 얻도록 예수님 자신께서 피를 흘리신다. 그럼으로써 새 언약이 수립된다. 이러한 사실을 마 20장에서 예수님 말씀하셨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이처럼 예수님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는 진정한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새로운 기반 역할을 한다. 그러고 나서 감람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다. 가는 길 중에 어떤 일들이 있는가?

1.5.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예고하심(26:31-35)

감람유는 올리브유. 올리브 산으로 가심. 올리브 산으로 가시는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뼈아픈 예고를 하신다. 위기 상황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31절>

pa, ntej u`mei/j skandalisqh, sesqe evn evmoi. evn th/| nukti. tau, th|, ‘너희 모두 오늘 밤에 나 때문에 넘어질 것이다.’
이러한 예고를 들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어야 했을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대조적 위치에 까지 놓으면서 자신감 넘치게 선언한다. 이 상황에서 열 하나와 자기를 분리시킨다. 베드로의 대답이 이 상황에서 어떠했어야 했을까? 답은 하나다. 주님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에게 그런 위기가 닥쳐온다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는 우습게 여긴다. 자신감 넘치는 그릇된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가 직면할 위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너만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만 오히려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끝까지..(3이라는 숫자) 그런데 이 정도 되면 베드로의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베드로 확고함 더욱 표현한다.

 

<32절>meta. de. to. evgerqh/nai, me,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참조. 16:21; 17:23; 20:19; 28:16-20

 

<33-35절>‘모두가 주님 때문에 넘어질지라도, 저는 결코 넘어지지 않겠습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제가 주님과 함께 죽는다 할지라도,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힐 예수님을 따라갈 제자들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스스로의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이 아니어야 한다. 베드로의 문제는 자기를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바른 제자의 태도는 반대로 자기의 자신감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자세를 갖는 것,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태도이다. 자기부정의 실질적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감을 내려놓는 것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 우리는 둘 중 항상 결정해야 한다. 베드로의 실패 중요한 이유는 자기 긍정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제자도를 깨닫지 못했다. 베드로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의 결여는 35절 b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와 함께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36절부터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시작된다.

1.6. 겟세마네 기도(26:36-46)

참조. 히 5:7-10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기 전 바로 전 아버지께 드리는 고뇌에 찬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술이 히브리서에서 발견된다. 겟세마네 기도와 연결해서 주목해야 할 기도이다.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경외하심)으로 응답을 받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응답으로 받은 것이고 그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워 가셨다는 것이다. 순종을 배우는 데 도구가, 방법이 기도였다.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가 아들이실지라도, 심한 통곡과 순종을 배워가셨다.

 

배움의 과정 속에서, 순종은 어떻게 자라는가? 기도함으로.
기도란 자기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기도 대상자에 대한 철저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자신의 삶의 과정 가운데 경험하신다. 히 4:14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러나 죄가 없으셨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그게 겟세마네 기도의 의미이다. 예수님은 열한 제자를 데리고 가시면서 변화산에 함께 데리고 가셨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좀 더 가까이 동행하신다.

 

<37-38절>to.n Pe, tron kai. tou.j du, o ui`ou.j Zebedai, ou,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참조. 20:22; 26:35
왜 그런가? 이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입으로 공헌했던 자들이다.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던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 잔을 마시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다. 그래서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던 제자들도 기도로 준비되기를 원하셨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을 위해 기도하자.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는 현장에 제자들도 기도로 준비할 기회를 주신 것 같다. 기도해야 할 수 있다. 자신감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실패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56절. 예수를 버리고 도망함.

 

h;rxato lupei/sqai kai. avdhmonei/n, ‘슬퍼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참조. 27:46; 히 5:7
왜 기도하려 하셨는지 이유를 보여주심.
왜 괴로워하고 슬퍼하셨을까?

  1. 지금까지도 경험하셨지만,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인격적 수모.
  2. 육체적 고통.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실 정도, 채찍을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
  3.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 아버지에게 버림 당하는 아들의 고통.

버림 당함.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느 정도 가까울까?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괴로운데, 이들은 본체가 하나인 관계이다. 부부의 관계는 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깨어질 수 없다.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우셨다.

 

peri, lupo, j evstin h` yuch, mou e [wj qana, tou, ‘내 영혼이 슬퍼서 죽을 지경이다.’

참조. 시 42-43편; 특히, 시 42:6
누가는 예수님의 이런 괴로움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분의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눅22:44
예수님의 기도의 절박함은 그분의 기도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mei, nate w-de kai. grhgorei/te metV evmou/,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절> e;pesen evpi. pro, swpon auvtou/, ‘자신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댐, 엎드렸다.
그분의 간절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간구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께 그러한 모습으로 기도하신다. 얼마나 절박하셨는지. 그 기도의 내용은 간략하면서도 핵심이 분명하다.

 

‘만일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뜻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기도의 초점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기도의 전반부를 보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그냥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것 같지만 <하실 수 있거든> 아버지의 뜻 안에 있다면.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원은 아버지의 뜻과 다른 영역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후반부는
아버지의 원대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두 개의 뜻이 상충될 때 기도의 목표는 내 뜻은 죽이고 아버지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40-41절>grhgorei/te kai. proseu, cesqe( i [na mh. eivse, lqhte eivj peirasmo, n,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간절히 기도했어야 했다. <깨어 기도하라> 배드로가 직면한 시험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을 때 자신 있게 부인의 가능성을 반박했던 베드로는 그 부인의 위험을 준비조차 실패하고 있다. 문제는 자신감이다. 그는 자신감 대신 자기부정의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로 준비하지 못한 베드로가 실패한 결과는 당연하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가 나타난다.

 

<42절>‘나의 아버지,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기도의 결과 내려놓게 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있다. 두 번째 기도 후에 예수님은 자고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기도 하신다. 눈앞에 다가올 위험 앞에서 육신이 연약하여 준비하지 못한 베드로의 세 번 부인과 철저한 대조를 이룬다.

 

 

체포와 심문(26:47-27:26)

2.1. 예수님의 체포(26:47-56)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실 때, 56절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기도의 실패는 죽음의 실패. 기도하지 않고 순종할 수 없다.


공회 앞에서의 심문(26:57-68)
무리에게 붙잡히신 예수님은 그날 밤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신다.

 

<57절> ‘대제사장 가야바... 서기관들과 장로들’
이미 일을 꾸며놓고 있는 것이다. 사형 재판은 원래 밤에 할 수 없었는데, 이들은 만일 이러한 규정이 예수님 당시에도 적용되었다면, 이들은 정식 공회 재판에 앞서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죄목을 찾을 밤샘 심문, 비공식적 심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이 텄을 때에야 법적 효력이 있다.


<58절>avpo. makro, qen, ‘멀찍이’
베드로가 자신의 공언을 그래도 지키고 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 보이고 인간적으로 처절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분을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베드로의 태도를 주목하게 된다. 독자들은 메시아의 시련과 죽음의 운명 앞에서 그분의 대처 방법과 베드로의 대처 방법이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하게 된다.

 

<59절> 거짓 증거를 찾으매.
대제사장들과 공회, 그들은 거짓증거를 찾고 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으니까 거짓 증거를 찾아 죽이자는 모습이다. 대제사장들의 문제 보게 된다. 전통과 제도 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만 눈에 보였던 것 같고, 진정한 권위를 상실한 영적 분별력 잃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형식적으로는 합법성을 강조하지만, 공평과 진리의 모습이 아니다. 실질적 법 정신에 맞지 않는, 껍데기는 있는데 내용은 없는 모습이다. 거짓증거도 찾기 어려웠다. 의미 있는 증언 하나가 제시된다.


<61절>‘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삼일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 참조. 12:6; 21:18-19; 23:38; 24:2; 요 2:19; 행 6:13-14; 쓱 6:12; 겔 40-48장
딱 하나. 거짓 증언이 두 사람이 나왔다. 진정성 여부를 판가름하기는 쉬지 않다. 그 어느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 그대로 하신 적이 없다. 요 2:19 가장 가까운 말. 예수님께서 헐겠다고 하신 적은 없다. 마태복음 안에서도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들은 있었지만, 그러한 예고들과 행동들을 반영해서 만들어 낸 그들의 말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거짓 증인들이 불리한 증언들을 하는데 침묵하신다.

 

<62-63절> o` de. VIhsou/j evsiw, pa,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참조. 사 53:7
지금까지 언급된 그 어떤 증언들도 정확하지 않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않으시는 적극적 순종의 일면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데 너무 열심이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사 53:7 말씀을 성취한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여 63절 질문한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명령하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시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관건은 과연 예수님이 그리스도인가 이다. 이 결정적 질문 앞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답하신다. 64절. 네가 말하였노라.

 

<64절>su. ei=paj, ‘당신이 말하였소.’
긍정적 답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유보적이기도 하다. 대제사장 질문 자체로서는 적절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다를 수 있다는 유보성이다. 그 의미를 예수님은 부연하신다. 64절 하반절.

 

‘이제로부터 당신들은 인자가 권능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볼 것이오.’

참조. 16:27-28; 22:41-46; 24:30; 시 110:1; 단 7:13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해방을 가져올 구출자는 아니고 인자이심을 밝히신다.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인자의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을 심문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이제부터, 지금부터 본다고 하신다. 이 사건 이후에 곧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의미하는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귀, 성전 파괴에 의한 메시아의 인자적 통치권, 심판적 권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의 모든 최종적 결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드러날 것이다. 지금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결국은 진정한 재판관, 심판장이 될 것이라는 역설.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심판당하게 될 것이라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단정한다.

 

그러고 나서 마태는 빌라도의 심문 전에 하나의 이야기, 베드로의 이야기를 삽입한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증언 앞에서 침묵하셨지만, 당신의 메시아되심에 대해서는 말씀하신다. 이제는. 당신의 인자되심을 명확하게 선언하신다. 죽음을 앞두고 그 죽음을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가심과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어떠한가?

 

<67절>evne, ptusan... evkola, fisan... evra, pisan,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참조. 5:39; 사 50:6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함(26:69-75)

 

베드로의 부인은 매번 그 정도를 더해감으로써 그가 얼마나 철저히 예수님을 부인했는지를 보여 준다: 단순한 부인(70절) → 맹세하며 부인(72절) →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74절).
베드로는 거듭 예수님을 부인한다. 여종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베드로의 모습과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한 예수님의 모습의 대조 성.

  1. 단순한 부인 70절
  2. 맹세하며 부인 72벌
  3.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 74절

예수님 앞에서 그처럼 당당했던 베드로가 힘없는 여종 앞에서 그렇게 부인하는 충격적 모습.
다른 한 여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를 고발하는 것에 대한 답변이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 베드로는 두 번째 부인에서 두 가지 실수를 한다. 1)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김. 2)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김.

 

세 번째 부인...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베드로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잘 보여준다. 바로 이때 닭이 울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남.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견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도로 준비하지 못했다.

 

<75절>evxelqw.n e;xw e;klausen pikrw/j, ‘밖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심히 통곡함. 마태는 베드로가 후일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재림 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을 앞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명예회복에 대해 언급되지 않고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마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빼버리고 열 한 제자라는 통칭으로 베드로가 포함한다. 베드로의 모습 여기서 끝인가?

 

마태복음 안에서는 그렇다. 우리 자신의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 앞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성. 한 여종 앞에서 지나가면 다시는 보지 않을 무리들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마태는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댓글